- 사랑하는 사람들끼리는 모든 것을 말하고 서로 모든 것을 알아야 한다고 하지만 사실은 말하지 않는 것이 많고, 모르는 것이 많은 사이가 아닐까요. 품 안에 좋은 것만 가득 담아서 “이게 모두 다 당신 거예요!” 하고 내밀고 싶은 마음이 사랑이니까요. 티끌만 한 무게도 사랑하는 사람에게는 얹어주고 싶지 않으니까요. 그래서 건드리면 금방이라도 눈물이 쏟아질 것 같은 날에도 있는 그대로의 감정을 말할 수가 없으며, 아무 일도 없는 척합니다. 사랑하는 사이에는 예외 없이 그런 날이 겹겹이 쌓여 있습니다. 이 사실을 깨달은 후에 상대를 바라보면 때로 가엾고 때로 애틋하며 그리고 고맙습니다.

- ‘영혼과 사랑의 결합’에 의심은 파국입니다. 의심이 들어찬 영혼에 사랑이 깃들 자리는 없으니까요. 사랑에 있어 의심은 치명적인 독입니다. 독이 퍼지면 그 사람이 왜 저런 행동을 하고 이런 말을 하는지 이해할 수 없습니다. 내가 사랑하는 사람은 대체 누구일까 알 수 없게 돼버립니다.
그러나 사랑은 이해와 같은 말이 아닙니다. 아무리 사랑한다해도 그 사람의 전부를 이해할 수는 없습니다. 하기는 사람 하나가 온 우주와 같다고 하는데 평생을 본다 한들 이해할 수 있을까요. 사랑은 차라리 수용입니다. 내 맘에 드는 것만 받아들이고 맘에 들지 않는 건 받아들이지 않는 선택적 수용이 아니라 어린왕자의 보아뱀이 코끼리를 삼키듯 꿀꺽 통째로 삼키는 것입니다. 이미 다 꿀꺽 삼켜버렸기 때문에 굳이 부위별로 나눠서 잘근잘근 씹어 소화할 필요가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저 사람이 어떤 사람이냐가 아니라 내 사랑이 어떤 사랑이냐’입니다.
적어도 사랑 앞에 부끄럽지 않은 사랑이었으면 좋겠습니다. 먼 훗날에 제대로 사랑하지 못한 것을 후회할 순 있어도 사랑하는 사람한테 속은 것을 후회하는 사람은 별로 없습니다. 사랑하는 사이에 믿지 못해서 생기는 비극은 있어도 믿어서 생기는 비극은 거의 없습니다. 그러나 그 사람을 믿기 위해 많은 노력이 필요하다면 아프더라도 돌아서라고 하고 싶습니다. 그런 사람은 사랑을 받을 자격이 없으니까요.

- 세상에 어떤 사랑은 상대가 눈앞에서 사라진 후에야 진실을 드러내기도 합니다. 나에게 잘해준 것만, 내가 못해준 것만 자꾸 떠오릅니다. 아무리 오랜 세월이 흘러도 빛바래지 않고 오히려 선명해집니다. 이럴 줄 알았으면 남들처럼 화내지 않고 나를 이해해줄 때마다, 헤어지자고 하지 않고 나를 사랑해줄 때마다, 온 세상을 다 가진 것처럼 기뻐하며 고맙다고 사랑한다고 할 걸 그랬습니다. 함께하고 싶은 일들이 생길 때마다 ‘다음에’라고 말하지 말고 그 순간에 당장 할 걸, 정말 그럴 걸 그랬습니다.

- 그리고 여기 또 다른 이야기가 있습니다. 1974년 5월 8일, 미국의 사진작가 듀안 마이클이 사랑하는 연인과 사진을 찍었습니다. 여자는 남자를 뒤에서 꼬옥 껴안고 있고, 카메라를 바라보는 두 사람은 마치 지금 이곳이 꽃구름 속인 양 달콤하고 행복해 보입니다. 훗날 그는 회고했습니다.
이 사진이 보증한다. 분명히 우리의 좋은 관계가 있었고 그녀가 나를 안고 있고, 우리가 너무도 행복해 보이고, 무엇보다도 우리를 감쌌던 오후의 햇살이 있다. 그런 일은 분명히 있었으며 그녀가 분명 나를 사랑했었다. 이 사진은 그때의 우리를 보증한다. 그런데 그녀는 어디에 있을까. 우리는 무엇 때문에 헤어졌을까. 헤어진 이유는, 정말 그랬을까. 과연 우리는 사랑했을까. 우리가 그때 진정 행복했을까. 정말 좋은 관계였다면 왜 그날 헤어졌을까. 이 사진은 우리의 무엇을 보증한다는 말인가. 사진이 보증하는 것은 1974년 5월 8일이었다는 사실뿐이다. 아무것도 보증하지 못한다. 우리는 사랑도, 행복도, 좋은 관계도 보증하지 못한다. 이 사진 속의 모든 이미지는 진실과 거리가 너무도 먼 것이다.
누구라도 몇 번이고 묻지 않았을까요. 그(녀)는 어디에 있을까. 우리는 무엇 때문에 헤어졌을까. 정말 그 이유 때문에 헤어졌을까. 과연 우리는 사랑했을까. 진정 행복했을까. 지금의 10~20대에게는 무시무시하게 들릴지 모르지만 그 똑같은 자문을 40이 되고 50이 되어도 합니다. 정작 당사자에게 답을 듣지 못해서일까요. 세월이 흐르면서 답을 듣고 싶은 상대가 사랑했던 사람인지, 사랑 그 자체인지도 모호해집니다.
지금 이 순간의 사랑이, 행복이, 햇살이 사실일지라도 아무것도 보증하지 못합니다. 비록 그럴지라도 기억해주기를요. 그 순간만큼은 진실했다는 진실을...

- 어디에서 어떻게 사는지 몰라 인사하고 싶어도 못한다고요? 그렇지 않습니다. 그 인사는 분명히 그쪽에 가닿을 겁니다. 김상운의 <<왓칭>>이라는 책에서 나오는 이 구절처럼요.
단 한 번이라도 인연을 맺었던 미립자들은 바로 곁에 있든, 우주 정반대편에 떨어져 있든, 아무 상관없이 빛보다 빠른 속도로 영원히 서로를 주고받는다.

- 멋진 신세계 사람들은 버나드가 데려온 야만인에게도 소마를 권합니다. 그가 우울해 보였으니까요. 야만인은 소마를 거절하면서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그냥 나대로 있고 싶습니다. 울적한 나대로가 좋습니다. 아무리 즐거울지라도 타인이 되고 싶진 않습니다.

- 대화의 미덕이 아무리 남의 말을 잘 들어주는 데 있다고 해도 생각이 오로지 ‘나’에만 사로잡힌 사람을 만나고 돌아오는 길은 육체적으로 피곤하고 정신적으로 허무합니다. 주어가 온통 ‘나’로 시작하는 그 말의 정체가 자기 자랑이라면 두말할 것도 없고 반대로 자기 상처나 연민이라도 사정은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모두 세상에 하나뿐인 자기가 가장 소중하다는데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으니까요. 내가 소중한 것이 아니라 나를 소중하게 만드는 것들이 소중한데, 나를 앞세우는 동안 그것들을 놓칠 수 있다는 생각을 미처 하지 못합니다. 그토록 세상에 둘도 없이 애지중지하는 ‘나’라는 것의 정체는 무엇일까요?

- 어른이 되면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것이 많을 줄 알았습니다. 갖고 싶으면 가질 수 있을 줄 알았고, 아주 멀리 떠날 수 있을 줄 알았습니다. 인생이 점점 나아지고 쉬워질 줄 알았습니다. 사랑이 뭔지 알게 될 줄 알았고, 몸이 늙으면 마음도 늙을 줄 알았습니다. 최소한 지금의 나보다 나은 사람이 될 줄 알았습니다. 더 이상 어리지 않아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것이 거의 없습니다. 아무리 갖고 싶어도 가질 수 없는 것이 있고, 지금은 아주 멀리 떠나기 곤란합니다. 언제나 늘 그 지금입니다. 어찌된 영문인지 살면 살수록 인생은 오리무중이며 산 넘어 산입니다. 아직도 사랑이 뭔지 모르겠고, 아무리 몸은 늙어도 마음은 늙지 않아 여전히 지금의 나보다 나은 사람이 되길 꿈꾸고 있습니다.

- ‘환상보행’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안개가 짙거나 어두운 밤에 등산할 때 자신은 앞으로 가고 있다고 믿지만 실제로는 제자리를 빙빙 돌며 원을 그리는 현상입니다. ‘vertigo’라는 말이 있습니다. 야간 비행을 하는 전투기 조종사가 높은 중력상태에서 수평 감각을 잃어버리고 한쪽이 기울어졌는데도 그것을 깨닫지 못하고 밤하늘의 별빛을 해상의 선박 불빛으로, 하늘을 바다로 바다를 하늘로 착각하는 현상입니다.
환상보행과 vertigo는 목숨을 잃을 수 있을 만큼 위험한 상황에서 정작 본인은 정상이라고 착각한다는 데 그 심각성이 있습니다. 그정도로 방향감각을 상실해버린 이유는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어둠에 갇혀버렸기 때문입니다. 이런 상태에서 의지할 수 있는 것은 자신의 감각밖에 없는데 감각이란 온전치 않아 때로 착각을 일으키기 쉽습니다. 이런 상황은 태초의 혼돈을 연상시킵니다. ...
견디기 힘든 상황에 처했을 때의 심정이 딱 그렇습니다. 어슴푸레하게 뭐가 보이기는 하지만 무엇인지 파악할 수 없고, 존재하기는 하지만 서로 맞붙어 있고 뒤섞여 있어서 역시나 뭐가 뭔지 알 수 없습니다. 내가 상대하는 실체를 파악할 수 없으니 어떤 선택과 결정을 내려야 할지 혼돈스럽기만 합니다. 이럴 때 흔히 취하는 행동이 남들에게 물어보는 것이지요. 일종의 현답을 구하는 것이지만 말이 좋아 현답이지 내게 딱 맞을 맞춤형 답을 구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까지 경험상 그렇게 물었을 때 답을 얻은 적은 거의 없습니다. 그들이 모자라서가 아닙니다. 그들이 내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내가 앓는 통증에 대해서 어떻게 설명해도 상대가 정확히 이해할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집니다. 이 거리감에서 발생하는 것이 외로움이고 고독이겠지요. 더구나 카오스 상태에서는 자기도 자신이 정확히 어떤 상황에 놓여 있는지 잘 모릅니다. 듣는 사람 입장에서는 심정적으로는 안타까워도 머리로는 횡설수설로 밖에 들리지 않을 가능성이 큽니다. 말하는 사람은 상대가 이해해주지 못해 서운하고, 듣는 사람은 역시 같은 이유로 괜히 미안합니다. 분위기만 애매해집니다.
이런 시행착오를 겪으면서 내린 결론은 ‘나에 대해 내가 모르는 것을 남들에게 물어봐야 남도 모른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자신에 대해 충분히 고민하고 생각하는 노력이 부족한 상태에서 쉽게 답을 구하려 했다는 질책이기도 합니다. 나에 관한 것은 내게 먼저 물어야 합니다. 그러나 그것이 감각에 묻는 일이어서는 곤란합니다. 착각에 빠져 환상보행이나 vertigo같은 참사를 겪을 수 있으니까요. 이럴 때 구상 시인의 <네 마음에다>라는 시가 시원하게 죽비를 날려줍니다.
요즘 멀쩡한 사람들 헛소리에 너나없이 놀아날까 두렵다.
길은 장님에게 물어라. 해답은 벙어리에게 들으라. 시비는 귀머거리에게서 밝히라. 진실은 바보에게서 구하라.
아니, 아니, 그게 아니라
길은 네 마음에다 물어라. 해답은 네 마음에게 들어라. 시비는 네 마음에서 밝히라. 진실은 네 마음에다 구하라.
뭐가 뭔지 알 수 없어서 막막하고 두려울 때 남한테 쉽게 답을 구하려 하지 말고 내 마음에 먼저 물어야 합니다. 카오스가 붕괴하면서 천지가 분리되고 태초의 세상이 창조된 것처럼 길도, 해답도, 시비도, 진실도 그렇게 구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카오스로부터 모든 것이 잉태되어 탄생합니다. 삶도, 사랑도, 예술도...

- 스물다섯 살 괴테가 젊은 베르테르의 입을 빌려 물었습니다. “인간에게 행복을 가져다주는 그 무언가가 불행의 원천이 될 수도 있다는 것은 과연 불변의 법칙일까?” 칼릴 지브란은 스무 살 때부터 구상해서 마흔 살에 출간한 산문시집 <<예언자>>에 이렇게 썼습니다.
그대가 기쁠 때 그대 가슴속을 깊이 들여다보라. 그대에게 슬픔을 주었던 그것이 오늘 그대에게 기쁨을 주고 있음을 알리라.
그대가 슬플 때 그대 가슴속을 다시 들여다보라. 그대에게 즐거움을 주었던 그것으로 인하여 지금 그대가 울고 있음을 알리라.
... 한고조 유방의 증손자인 유안이 <<회남자>>에 썼던 변방에 사는 늙은이의 말, 새옹지마가 그것입니다.
국경 가까운 곳에 한 노인이 살고 있었는데 어느 날 그의 말이 오랑캐 땅으로 도망가버렸습니다. 사람들이 위로하자 노인이 말합니다. “이것이 복이 될지 누가 알겠는가?” 몇 달 후 도망갔던 말이 오랑캐의 준마를 여러 마리 이끌고 돌아왔습니다. 사람들이 이를 축하하자 노인이 말했습니다. “이것이 재앙이 될지 누가 알겠는가?” 집에 좋은 말이 늘어나자 그의 아들이 말타기를 즐겼는데 말을 타다 떨어져 다리가 부러지고 말았습니다. 사람들이 위로하자 노인이 말했습니다. “이것이 어찌 복이 되지 않겠는가?” 일 년 후 오랑캐들이 쳐들어왔습니다. 변방에 사는 젊은이들은 모두 군대에 징발돼 오랑캐와 싸우다가 전사하고 말았지만 절름발이였던 노인의 아들은 징발을 면한 까닭에 목숨을 건질 수 있었습니다.
복이 됐던 것이 화가 될지 어찌 아는가? 화가 됐던 것이 다시 복이 될지 어찌 아는가? 삶은 이처럼 예측할 수 없으니 기쁠때는 삼가고, 슬플 때는 순리를 따라야 한다고 합니다. 아무래도 모든 것이 다 공처럼 둥근 것 같습니다. 그래서 희로애락도 공처럼 굴러가버리는 것 같습니다. 많은 사람이 슬픔과 고통, 분노에 대해서만 그 말을 적용하고 싶어 하지만 기쁨과 사랑 행복 또한 마찬가집니다. 그러니 어느 한순간이라도 소중하지 않을 수가 있을까요.

- 매의 무서움은 맞으면 누구라도 아프고 어디라도 아프다는 것. 사람을 강하게도 만들지만 비굴하거나 약하게도 만든다는 것. 그러니 그만한 고통을 당하기 전에는 나도, 그 누군가도 진정으로 어떤 사람인지 알 수가 없다는 데 있습니다. 맞으면 아프길 바랍니다. 아프면 아파하길 바랍니다. 마음에 매를 맞고도 아프지 않은 약 같은 건 앞으로도 나오지 않기 바랍니다. 그런 통증조차 느끼지 못한다면 마음이 돌덩이와 다를 게 무얼까요. 부디 그 통증을 자신과 타인을 찌르는 칼이 아닌 금으로 만들기를 바랍니다.

- 세상에 태어나 처음 한 일이 울음이라선지 사는 내내 울 일이 많습니다. 속 시원히 목청껏 울 수 없어 속울음을 웁니다. 등으로 웁니다. 울음을 참고 사는 사람의 뒷모습은 언제나 울고 있습니다. 옛날엔 울고 싶으면 남의 초상집에 가서 실컷 운다고 했다는데 요즘은 초상집에서도 목청껏 울지 않습니다. 울음은 산 사람이 삶이 고통스러워 내는 신음입니다. 파울 클레는 그림을 그리는 동안에는 그 신음을 내지 않을 수 있었습니다. 그것이 그가 그림을 그린 처음이자 마지막 이유였습니다. 우리는 울지 않기 위해 무엇을 하고 있을까요. 이것을 하는 동안만큼은 삶의 고통을 잊을 수 있노라 할 수 있는 그 무엇 말입니다.

- 불행한 사람들이여! 당신과 같은 처지에 놓인 한 인간이 온갖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혼신의 힘을 다해 마침내 빛나는 인간의 대열로 솟아오른 모습을 떠올리며 스스로를 위로하라.
죽기로 작정하고 쓴 유서였지만 역설적이게도 왜 음악을 계속해야 하는지에 대한 결심을 다지게 만들었고, 원래의 자리로 돌아왔습니다. 그 후로 이어진 스물다섯 해의 삶. 베토벤은 자신의 삶에 대해 수없이 슬퍼하고 노여워했지만 단 한 번도 운명 앞에 순순히 무릎 꿇은 적은 없었습니다. 베토벤에게 운명이란 이런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내 운명의 목을 죄어주고 싶다. 어떤 일이 있더라도 운명에 져서는 안된다.”

- ... 50년 전 그때 윗집 할머니, 앞집 옆집 아주머니들은 와르르~ 웃음을 터뜨렸겠지요. 권정생 어린이가 도모코에게 기껏 숙제까지 해주고 당한 봉변을 바람 불면 날아갈 티끌쯤으로 여겼을 것입니다. 설마 50년이 지나서도 이를 갈 만큼 모욕을 느꼈을 거라곤 짐작도 못했을 것입니다. 이 시의 제목은 <인간성에 대한 반성문2> 입니다. 작가도 알고 있습니다. 50년이 지났는데도 도모코를 용서하지 못한 자신의 인간성을 반성해야 한다고, 그래도 이가 갈리는 건 어쩔 수가 없습니다. 인격적으로 받은 모욕이나 모독은 오랜 세월이 흘러도 잊히지 않습니다. 많은 사람 앞에서 당한 것이라면 더욱 그렇습니다. 잊을 만하다가도 불현듯 떠오르면 그 일을 처음 당한 때와 똑같은 강도로 울화가 치밀어 오릅니다. 정작 장본인은 쓰레기처럼 아무렇게나 내뱉은 한마디라서 기억조차 못할 텐데 말이지요. 그런데 정말 기억 못한다고 하면 더 이가 갈릴 것 같습니다. 그러면서도 ...
아직도 용서하지 못하고 미워하는 스스로가 부끄럽고 죄스럽습니다. 그 때문에 늘 인간성에 대한 반성문을 쓰는 일은 정작 못된 말을 한 나쁜 사람이 아니라 그 한마디, 아직도 마음에서 씻어내지 못해 자책하는 착한 사람의 몫일 때가 많습니다.

- 자신의 생각대로 억지로 하려 해서는 안된다. 어떤 일이 일어나든 그대로 두고 그저 바라보라. 그러면 그대의 삶은 안정된 흐름을 타게 될 것이다. 자기 권한 밖의 일까지 욕심을 내서는 안된다. 그랬다가는 주어진 것마저 잃어버린다.

- 문제는 사건 자체가 아니라 사건에 대한 우리의 해석이다. 사건 자체는 우리를 해치거나 가로막지 않는다. 타인들 역시 그러하다. 그들을 어떻게 바라보느냐가 문제다. 우리의 태도나 반응이 고난을 가져오는 것이다. 우리는 자신의 외적인 상황을 선택할 수 없다. 하지만 그 상황에 어떻게 반응할 것인가는 언제나 선택할 수가 있다.

- 마음의 고통은 화를 내게 된 원인으로 인한 것이 아니라 화를 냈을 때 얻게 되는 결과다.

- 당장에는 그 상황, 그 사람 때문에 기분이 상하고 마음을 다친 것 같아도 사실은 내가 화를 내고 있다는 자체가 마음을 가장 힘들게 합니다. 존엄도, 품위도, 자존심도 다 내동댕이쳐진 것 같고, 그래서 자유와 평안을 잃어버린 노예처럼 돼버린것 같지요. 처음에는 타자를 향해 화를 내지만 화를 내고 분노를 곱씹을수록 부정적인 감정은 눈덩이처럼 커다랗게 불어나 종내는 나를 향해 굴러떨어집니다.
이미 일어나버린 일, 원래부터 그런사람... 내가 그런 상황을, 그런 사람을 바꿀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그런 상황, 그런 사람에게 어떻게 반응할 것인지는 선택할 수 있습니다. 미셸 푸코를 예로 들면 이렇게 대처 했다고 하지요.
“바보들이 존재하는 것은 어찌할 수 없는 일이다. (중략) 세상 사람들이 가장 공평하게 나눠 가진 것은 양식이 아니라 어리석음이다.”
화내지 마세요. 내 속, 남의 속 시끄럽게 하면서 소란을 피우거나 선동하지 마세요. 화를 덜 내면 고통의 가짓수가 한결 줄어듭니다.

- 인간이 고통을 통해 정화되고 순화되며 더욱 현명해지고 이해심이 많아진다는 말은 사실이 아니야. 오히려 고통속에서 인간은 차갑게 냉정해지면서 무관심해진단다.
사람이 과장하기 쉬운 것 중에 하나가 자신의 고통입니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고통 자체에는 별 의미가 없습니다. 고통을 많이 겪은 것이 그 사람의 깊이가 될 수도 없습니다. 비슷한 위기나 고통을 반복해서 겪는 사람이라면 오히려 경계해야 할 대상이 아닐까요. 자신의 고통이 어디로부터 연유한 것인지 깊이 사유하지 않았다는 뜻이니까요. 고통을 통해 배우고 깨달은 것이 없다는 뜻이니까요. 고통을 얼마나 겪었는지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고통 중에 있을 때 어떤 선택과 결단을 내렸으며 그에 따라 어떻게 행동했는지가 중요합니다. 그것이 바로 진정한 고통의 경험이며 그 경험들이 쌓여 인격이 됩니다. 그래서 나쁜 성격은 없어도 나쁜 인격은 있습니다.

- 성공을 기다릴 수가 없어서 성공 없이 그냥 나아갔다.
삶의 목적이 달라졌습니다. 지금까지 성공이 목적이었다면 이제는 삶 자체가 목적이 됐습니다. 간절히 바라고 기다리는 것이 오히려 발목을 잡는 덫이 될 수 있습니다. 간절히 바라는 것 하나 때문에 사소하지만 중요한 행복들을 놓칠 수 있으니까요. 그러니 언제까지 마냥 기다릴수만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방법을 바꿨습니다.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그냥 나아가기로요. 그렇게 끝까지 가면 됩니다. 순자가 말했지요.
빠른 말은 하루에 천리를 달리지만 좀 더딘 말도 열흘 계속 달리면 따라갈 수 있다.
중요한 것은 빨리 가는 것이 아니라 끝까지 가는 것입니다. 엎어지고 넘어져도 다시 일어나 고개를 들고 앞을 바라보며 느려도 끝까지 말입니다. 그 길은 천리마가 아니라도 갈 수 있습니다. 그렇게 열흘 더 가면 됩니다. 공자의 제자 안자가 말했습니다.
“행하는 자는 항상 성취하기 마련이고 걷는 자는 포기하지 않으면 끝내 목적지에 도달한다.”

- 완벽한 것은 없다. 모든 것엔 금이 가 있다. 빛은 그곳으로 들어온다.

- “그 사람, 참 좋은 사람이야”라고 하는 말을 들으면 부러웠습니다. 남들에게 그런 칭찬을 받는 그 사람이요. 그러나 사실은 누군가를 좋은 사람이라고 말하는 사람이야말로 정말로 좋은 사람이 아닐까요. 타인 속에 있는 위대함과 아름다움을 발견하는 눈을 가졌으니까요.

- 내가 가진 것 중에 좋은 것은 언제나 있습니다. 아이스크림처럼 맛있는 음식일 수도 있고, 오늘 따라 유쾌한 기분일 수도 있지요. 웃음, 친절, 시간은 내가 가진 것 중에 언제나 가장 좋은 것이며 열정, 재능, 젊음 또한 그렇습니다. 이것들을 사는 동안 남김없이 쓰지 않는다면...
얼마나 따분한가. 멈춰 서는 것, 끝내지 않는 것, 닳지 않고 녹스는 것, 사용하지 않아 빛을 내지 못하는 것은 ...
멈추지 말고 끝내야 합니다. 녹슬지 말고 닳아야 합니다. 삶이 그래야 하고, 내가 가진 것 중에 좋은 것의 사용법이 그래야 합니다. 그래서 이생을 떠날 때 홀가분한 마음으로 ‘아, 참 재밌었다’그럴 수 있다면 참 좋은 일이겠지요.

- 마틸다가 물었지요. “사는 게 너무 힘들어요. 어리기 때문에 그런가요?” 레옹이 무덤덤하게 답합니다. “언제나 그래.”

- 끝이 보이는 것이 꼭 나쁜 것만은 아닙니다. 사랑이든 일이든, 지금까지 최선을 다했다면 헛되지 않습니다. 그 노력과 경험이 다른 단계의 시작을 만드는 데 큰 힘과 지혜를 줄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 삶은 그렇게 끊임없이 무엇인가가 되어가는 영속적인 과정입니다. 그리고 또한 간절히 바라던 것을 얻어서 기쁘거나 얻지 못해서 슬플 때, 쇼의 다른 이 말을 새겨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습니다. “인생에는 두 가지 비극이 있다. 하나는 당신의 마음속으로 바라던 바를 얻지 못하는 것이요, 나머지 하나는 그것을 얻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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