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내의 마술
아내가 슬프고 슬픈 아내를 보고 있는 내가 슬프고 그때 온 장모님 전화 받으며, 그러엄 우린 잘 지내지, 하는 아내 속의 아내는 더 슬프다. 마술처럼 완벽한 세상에서 살고 싶다. 모자에서 나온 토끼가 모자 속으로 자청해서 돌아간다. 내가 거울 속으로 들어가려 하면 딱딱한 면은 왜 나를 막는가. 엄마가 아이를 버리고 직업이 아비를 버리고 병이 아픈 자를 버리고 마술사도 결국 토끼를 버리고. 매정한 집이, 너 나가, 하며 문밖에 길을 쏟아버리자 미망이 그 길을 받아 품에 한번 꼭 안았다가 바로 버린다. 온 세상을 슬픔으로 물들게 하려고 우는 아내가 식탁 모서리를 오래오래 쓰다듬고 있다. 처음 보는 신기한 마술이다
여, 자로 끝나는 시
안녕하세여, 어디가세여, 나 몰라라 도망가지 말아여, 우리 피시방에서 만났던가여, 아니, 전생이었던 것 같네여, 어떻게 지내셨어여, 전 오늘 좀 슬퍼여, 사실 애인이랑 막 헤어졌어여, 육 개월 동안 밤마다 애무하던 그녀 다리가 의족인 줄 어제서야 알았어여, 뭘여, 제가 나쁜 놈이지여, 저 위 좀 보세여, 저놈의 달은, 누가 자기 자리 뺏어갈까 봐 낮부터 저러고 버티고 있네여, 참 유치하지여, 한 백 년 만인가여, 기억나세여, 당신의 아버지를 어머니라고 부르곤 했지여, 그냥 친근해서여, 전 호부호형 안해여, 다 어머니라고 해여, 제 삶은 홍길동전과 오이디푸스 신화의 희극적 만남이지여, 도대체 누구냐고여, 몇 생 전이던가여, 우리 어느 심하게 게으른 나라의 국가대표 산책팀 소속이었자나여, 기억 안 나세여, 왜 저보고 사는 게, 납치할 아이 하나 없는 세상의 유괴범처럼 황당하게 외롭다고 그랬자나여, 불어였던가여, 스페인어였던가여, 왜, R 발음에 세상의 모든 부조리를 우겨 넣은 듯한 언어로 말했자나여, 그렇지여, 첫번째 생 다음은 다 후렴구지여, 그렇지여, 신은 희로애락을 무한의 버전으로 믹싱하는 DJ지여, 그렇지여, 우리 인간은 그 리듬에 맞춰 춤이나 출 따름이지여, 같이 커피나 한 잔 하실래여, 전 크림 안 넣어여, 하얀 게 뭉게뭉게 번져가는 걸 보고 있음 괜히 기분 나빠져여, 뻔한 성적 상상력에 지나친 예민함이라고나할까여, 누구 기다리세여, 다행이군여, 요새는 뭐 하시나여, 전 요새 시 다시 쓰고 있어여, 사실은 아무거나 쓰고, 이거 시다, 그러고 있어여, 엊그제께는 이력서에 사진까지 붙이고, 이거 시다, 이거 이력서 아니다, 그랬지여, 취직은 몇 번의 후생에나 가능하다 여겨집니다여, 아, 제가 이상한 놈으로 보이나여, 님의 표정이 불편하다는 의사를 살짝 비춰주시네여, 그러세여, 붙잡지 않겠어여, 커피 값은 제가 ...... 아, 그래 주면 고맙지여, 안녕히 가세여, 시간 뺏어서 죄송합니다여, 다음 생에 볼 수 있음 또 보지, 아님 말지, 여.
'book' 카테고리의 다른 글
인간의 굴레에서 Ⅱ- 서머싯 몸 (0) | 2020.11.19 |
---|---|
우리는 서로 부르고 있는 것일까 - 마종기 (0) | 2020.08.29 |
보통 사람의 글쓰기 - 이준기 (0) | 2020.08.25 |
내가 원하는 천사 - 허연 (0) | 2020.08.12 |
내 무덤, 푸르고 - 최승자 (0) | 2020.08.0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