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설마 무슨 이상 같은 게 있는 건 아니죠?”

물론 없지. 인생에는 그런 거 필요 없어. 필요한 것은 이상이 아니라 행동 규범이야.”

 

- 5월의 일요일에 주오 선 전철 안에서 우연히 나오코를 만나지 않았더라면 내 인생도 지금과는 많이 다를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금세, 아니, 만약에 그때 만나지 않았더라도 결국은 마찬가지였을지도 모른다고 생각을 고쳤다. 아마도 우리는 그때 만나야 했기에 만났을 것이고 그때 만나지 않았더라도 또 다른 곳에서 만났을 것이다. 딱히 무슨 근거가 있는 건 아니지만 나는 그런 생각을 했다.

 

- “내가 다닌 학교에서는 대부분이 부자였어.” 그녀는 무릎위에서 두 손바닥을 위로 보이며 말했다. “그게 문제였어.” 있지, 부자의 가장 큰 이점이 뭐라고 생각해?” “몰라.” “돈이 없다는 말을 할 수 있다는 거야. 이를테면 내가 우리반 친구들에게 뭘 좀 하자고 하면 난 지금 돈 없어서 안 돼.’라고 해. 반대 입장일 때, 난 도저히 그런 말은 못 할 거야. 내가 돈이 없다고 하면, 그건 정말로 돈이 없는 거야. 너무 처량해. 예쁜 여자애가 나 오늘 얼굴이 너무 안 좋아서 외출 못 해.’라고 말하는 거하고 똑같아. 못생긴 애가 그런 말을 한다고 생각해 봐, 다들 웃을 거야. 그게 바로 내가 사는 세계였어. 작년까지 육 년간.”

 

- “ … 그냥 생각한 것만큼 슬프지 않다는 것뿐이야. 솔직히 말해 눈물 한 방울 흘리지 않았어. 어릴 적에는 기르던 고양이가 죽었다고 그렇게나 울었는데도.” 하지만 그건 내 탓만은 아냐. 물론 내가 좀 정이 없는 사람이긴 해. 그건 인정해. 그러나 만일 그 사람들이, 엄마 아빠가 조금만 더 나를 사랑해 줬더라면 나도 좀 다르게 느낄 수 있었을 거야. , , 더 슬픈 마음이었을거야.”

 

- 누군가에게 편지를 쓸 수 있다는 건 정말 좋아. 누군가에게 자기 생각을 전하고 싶어서 책상에 앉아 펜을 들고 이런 문장을 쓴다니 얼마나 멋진 일인지 몰라. 물론 문장으로는 자신이 하고 싶은 말에서 일부분밖에 표현할 수 없지만, 그래도 상관없어.

 

- “자주 그래. 감정이 차올라서 울어. 괜찮아, 그건 그것대로. 감정을 바깥으로 표출하는 거니까. 무서운 건 그걸 바깥으로 드러내지 못할 때야. 감정이 안에서 쌓여 점점 딱딱하게 굳어 버리는 거지. 여러 가지 감정이 뭉쳐서 몸 안에서 죽어 가는 거. 그러면 큰일이야.”

 

- “내 인생에서 가장 좋은 시간이 고작 이십 년 정도로 끝나 버린거야. 정말 너무하지 않아? 모든 가능성을 손에 쥐고 있었는데 문득 들여다보니 아무것도 없는 거야. 아무도 박수 쳐 주지 않고 아무도 떠받들어 주지 않고 아무도 칭찬해 주지 않고, 집에서 하루하루를 이웃 아이들에게 바이엘이니 소나티네 같은 걸 가르칠 따름이야. 내 신세가 너무 처량해서 툭하면 울고 그랬어. 너무 억울해서. 누가 봐도 나보다 재능이 떨어지는 애가 어느 콩쿠르에서 2등을 했다는 둥, 어느 홀에서 개인 연주회를 했다는 둥, 그런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너무 억울하고 처량해서 눈물이 뚝뚝 떨어졌지. 부모도 마치 내가 무슨 폭탄이라도 되는 양 조심스럽게만 대했어. 물론 나도 알았지, 그 사람들도 낙담했다는 걸. 얼마전만 해도 딸을 자랑으로 여겼는데 지금은 정신 병원 입원 이력이 남은 문제아라니.

 

- “편지에 썼지? 난 네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불완전한 인간이라고. 네가 생각하는 것보다 난 더 심각하게 아프고, 뿌리도 아주 깊어. 그러니까 만일 앞으로 나아갈 수 있다면 너 혼자라도 가줘. 날 기다리지 말고. 다른 여자애랑 자고 싶으면 자고. 내 생각 하면서 망설이거나 하지 말고 당당하게 하고 싶은 대로 해. 아니면 난 너까지 끌고 갈지도 몰라. 설령 무슨 일이 있다 해도 그런 짓만은 하기 싫어. 네 인생을 가로막고 싶지 않아. 누구의 인생도 방해하고 싶지 않아. 아까도 말했듯이 가끔 만나러 와주고, 나를 언제까지나 기억해 줘. 내가 바라는 건 그것뿐이야.”

내가 바라는 것은 그뿐만이 아냐.”

하지만 나랑 같이 있으면 네 인생을 허비하게 돼.”

난 아무것도 허비하는 게 아냐.”

 

- “인생이란 비스킷 깡통이라 생각하면 돼. 비스킷 깡통에는 여러 종류 비스킷이 있는데 좋아하는 것과 별로 좋아하지 않는 것이 있잖아? 그래서 먼저 좋아하는 것을 먹어 치우면 나중에는 별로 좋아하지 않는 것만 남는 거야. 나는 괴로운 일이 있으면 늘 그런 생각을 해. 지금 이걸 해두면 나중에는 편해진다고. 인생은 비스킷 깡통이라고. 그렇지만 정말이야. 나는 경험적으로 배웠어.”

 

- “?”

왜라니?” 미도리는 화를 냈다. “너 정말 머리가 이상한 거 아니야? 영어 가정법을 알고 수열을 이해하고 마르크스를 읽을 수 있으면서 어째서 이런 건 몰라? 왜 그런 걸 물어? 왜 여자한테 이런 말을 하게 만들어? 그보다 네가 더 좋기 때문이란 거 당연하잖아. 나 말이야, 좀 더 잘생긴 남자를 좋아하고 싶었어. 그렇지만 어쩔 수 없어. 네가 좋아져 버렸으니까.”

 

- 우리(우리라는 것은 정상적인 사람과 비정상적인 사람을 하나로 묶은 총칭이에요.)는 불완전한 세계에서 살아가는 불완전한 인간이에요. 줄자로 길이를 재고 각도를 재거나 해서 은행 예금처럼 조금씩 빼내 먹으며 살아갈 수는 없는거예요. 그렇죠?

 

- 나오코의 죽음이 나에게 그 사실을 가르쳐 주었다. 어떤 진리로도 사랑하는 것을 잃은 슬픔을 치유할 수는 없다. 어떤 진리도, 어떤 성실함도, 어떤 강인함도, 어떤 상냥함도, 그 슬픔을 치유할 수 없다. 우리는 그 슬픔을 다 슬퍼한 다음 거기에서 뭔가를 배우는 것뿐이고, 그렇게 배운 무엇도 또다시 다가올 예기치 못한 슬픔에는 아무런 소용이 없다.

 

- “저기, 와타나베, 나랑 그거 해.” 기타를 다 치고 난 다음 레이코 씨는 작은 목소리로 그렇게 말했다.

신기하네요. 나도 같은 생각을 했거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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