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나키스트 트럭1
슬픈 사람들이 트럭을 탄다. 트럭은 정체에 걸릴 때마다 힘겹게 멈췄다. 정체가 풀리면 트럭은 부식된 하체 어디선가 슬픔을 흘리며 느리게 움직였다. 트럭에 올라탄 사람들이 두 손으로 신을 그려보지만 이내 슬픔이 신을 덮는다. 언제나 그랬듯이 그들에겐 이상하게 어깨가 없다. 찌그러지고 때 묻은 트럭은 세월을 등에 업고 생의 마지막 질주를 했다. 낙오한 사람들은 어느새 세월의 등에 올라타 있었고. 도시는 어두웠고 트럭은 주저앉았다. 낙오자들은 뿔뿔이 골판지 같은 골목으로 사라졌다. 주저앉은 트럭은 도시와 아주 잘 어울렸다. 그렇게 밤이 왔다. 이미 어두웠지만 트럭은 어두워지지 않았다. 안녕, 트럭.

오십 미터
마음이 가난한 자는 소년으로 살고, 늘 그리워하는 병에 걸린다. 오십 미터도 못 가서 네 생각이 났다. 오십 미터도 못 참고 내 후회는 너를 복원해낸다. 소문에 돌아서면 잊어버리는 축복이 있다고 들었지만, 내게 그런 축복은 없었다. 불행하게도 오십 미터도 못 가서 죄책감으로 남은 것들에 대해 생각한다. 무슨 수로 그리움을 털겠는가. 엎어지면 코 닿는 오십 미터가 중독자에겐 호락호락하지 않다. 정지 화면처럼 서서 그대를 그리워했다. 걸음을 멈추지 않고 오십 미터를 넘어서기가 수행보다 버거운 그런 날이 계속된다. 밀랍 인형처럼 과장된 포즈로 길 위에서 굳어버리기를 몇 번. 괄호 몇 개를 없애기 위해 인수분해를 하듯, 한없이 미간에 힘을 주고 머리를 쥐어박았다. 잊고 싶었지만 그립지 않은 날은 없었다. 어떤 불운속에서도 너는 미치도록 환했고, 고통스러웠다. 때가 오면 바위채송화 가득 피어 있는 길에서 너를 놓고 싶다

가시의 시간 1
내 온몸에 가시가 있어 밤새 침대를 찢었다. 어제 나의 밤엔 아무것도 남지 못했고 아무것도 들어오지 못했다. 가시는 아무런 실마리도 없이 밤마다 돋아 나오고 나의 밤은 전쟁이 된다. 출구를 찾지 못한 치욕들이 제 몸이라도 지킬 양으로 가시가 되고 밤은 길다. 가시가 이력이 된 날도 있었으나 온당치 않았고 가시가 수사가 된 적이 있었으나 모든 밤을 다 감당하진 못했다. 가시는 빠르게 가시만으로 완전해졌고 가시만으로 남았다. 가시가 지배하는 밤. 가시의 밤

천호동-장마7
후회하는 법을 배우고 우리는 뻘에다 완성되지 못한 낱말들을 적었다. 생애를 다 볼 수 없었으므로. 그 여름 낮게 날아가는 새들은 지저분한 털뭉치 같았고 강 건너에선 기울어진 매운탕집 간판들이 울먹이고 있었다. 반지하 방에서 기침을 하던 너의 슬픔을 가져오지 못한 게 아주 오래 아프다. 스물여섯 살. 천호동엔 비가 샜고 낡은 관악기 같은 목젖에선 피가 새어 나왔다. 눈앞에선 여름내 동쪽에서 왔다는 부표들이 소혹성처럼 떠올랐다. 아침이면 아무르에서 왔다는 새를 보러 가곤 했다. 그해, 고양이들이 부르르 몸을 떨고 나팔꽃들은 쓰러져 일어나지 못했다. 그만 아프자고 너는 떠났고 나는 질퍽이는 뒷골목을 걸어 강으로 갔다. 마음의 짐을 이겨내지 못한 사람들이 물속으로 걸어 들어가고 있었다. 이 놀라운 강의 밀도.

자세
위대한 건 기다림이다. 북극곰은 늙은 바다코끼리가 뭍에 올라와 숨을 거둘 때까지 사흘 밤낮을 기다린다. 파도가 오고 파도가 가고, 밤이 오고 밤이 가고. 그는 한생이 끊어져가는 지루한 의식을 지켜보며 시간을 잊는다. 그는 기대가 어긋나도 흥분하지 않는다. 늙은 바다코끼리가 다시 기운을 차리고 몸을 일으켜 먼바다로 나아갈 때. 그는 실패를 순순히 받아들인다. 다시 살아난 바다코끼리도, 사흘 밤낮을 기다린 그도, 배를 곯고 있는 새끼들도, 모든 걸 지켜본 일각고래도 이곳에서는 하나의 ‘자세’일 뿐이다. 기다림의 자세에서 극을 본다. 근육과 눈빛과 하얀 입김. 백야의 시간은 자세들로 채워진다.

FILM2
신은 추억을 선물했고 우리는 근본이 불분명한 젤리를 씹으며 참 많은 것을 용서했다 가끔씩 어떤 끔찍함이 탄환처럼 빠르게 삶을 관통하고 지나갔지만 뜨거움은 그때뿐이었다. 탄환의 고통을 생각하면 눈물이 흘렀다 태생적인 방관자들이 부러웠고 느티나무의 실어증이 부러웠다 그날그날의 슬픈 방을 찾아들어가며 우리는 울고 있었다 눈이 내렸다. 수만 년 전 조상들이 이러했을까 그들도 눈을 맞으며 울었을까 아무것도 저지르고 싶지 않아서 밤새 울었다 따뜻한 오줌을 누며 방점을 찍듯 깜빡이는 가로등에 기대 느린 노래를 부르기도 했다. 수십만 년 동안 같은 모양의 눈송이는 한 번도 내린 적이 없었다 밤새 눈은 연옥을 덮고 있었다

장마의 나날
강물은 무심하게 이 지지부진한 보호구역을 지나쳐 갑니다. 강물에게 묻습니다.
“ 사랑했던 거 맞죠?”
“네”
“그런데 사랑이 식었죠?”
“네”
상소 한 통 써놓고 목을 내민 유생들이나, 신념 때문에 기꺼이 화형을 당한 사람들에게는 장마의 미덕이 있습니다. 사연은 경전만큼이나 많지만 구구하게 말하지 않는 미덕, 지나간 일을 품평하지 않는 미덕, 흘러간 일을 그리워하지도 저주하지도 않는 미덕. 핑계 대지 않는 미덕. 오늘 이 강물은 많은 것을 섞고, 많은 것을 안고 가지만, 아무것도 토해내지 않았습니다. 쓸어 안고 그저 평소보다 황급히, 쇠락한 영역 한가운데를 모르핀처럼 지나왔을 뿐입니다. 뭔가 쓸려가서 더는 볼 일이 없다는 건, 결과적으로 다행스러운 일입니다. 치료 같은 거죠. 강물에게 기록 같은 건 없습니다 사랑은 다시 시작될 것입니다

시인의 말
난 알고 있었던 것이다. 생은 그저 가끔씩 끔찍하고, 아주 자주 평범하다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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