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마다가스카르 3

그날, 동네 하천이 넘쳤을 때. 어머니는 사람들 만류를 뿌리치고 무릎까지 잠긴 집에 들어가 아들이 아끼던 수동 타자기를 들고 나왔다. 난 그날 번지점프를 하러 갔다. 전화기 너머에서 어머니가 물었다. "바오로니 베드로니?" 난 대답했다. "아니오 예수입니다." 난 그날 마다가스카르로 갔다. 어머니가 돌아가신 날 육개장을 퍼먹으며 나는 나의 이중성에 치를 떨거나 하진 않았다. 난 그날 야간 비행을 하러 갔다. 나의 소혹성에서 그런 날들은 다른 날과 같았다. 난 알고 있었던 것이다. 생은 그저 가끔씩 끔찍하고, 아주 자주 평범하다는 것을. 소혹성의 부족들은 부재를 통해 자신의 예외적 가치를 보여준다. 살아남은 부족들은 시간을 기억하는 행위를 통해서만 슬퍼진다. 어머니. 나의 슬픈 마다가스카르.

 

신전 3

#1 대를 이어 신전을 지었지만 신은 찾아주지 않았다. 이번에도 약속은 지켜지지 않았다.

#2 결국 실패로 끝나는 길고 지루한 탈옥 영화를 봤을 때 신전을 지었던 자들이 떠올랐다. 이렇듯 인간은 어디서든 신전을 짓는다. 사는 일은 내내 뭔가를 궁구하며, 손톱깎이 같은 걸로 육중한 회벽에 구멍을 내는 일. 생선좌판에 앉아 수십 년 동안 파리 떼를 쫓거나 어차피 지루해질 거라는 걸 알면서 살아 있는 내내 사랑을 하는 일. 신전을 세우는 일이다.

#3 신전은 완성되는 순간 의지를 앗아 간다. 신전 근처 개들은 비참하게 짝을 짓고 신전 벽의 화려했던 색은 소멸한다.

 

소립자 2

기억이라고 말하는 순간, 그 순간은 이미 낡은 것이다. 그녀의 작은 손을 감싸고 있던 줄무늬 장갑이라든지, 부시시 깨어나 받는 전화 목소리라든지, 술에 취했을 때 눈에 내려앉는 습기라든지. 낡은 것들이 점점 많아질 때 삶은 얼마든지 분석이 가능하다. 어떤 오래된 골목길에 내가 들어섰던 시간, 그 순간의 호르몬 변화, 가로등 불빛의 밝기와 방향, 그날의 습도와 주머니 사정까지. 나를 노려보던 고양이의 불안까지. 그 골목에서 이런 것들이 친밀감의 운동을 시작했고 나에게 수정되지 못할 기억으로 남았다. 누구는 그걸 사랑이라 했고, 누구는 그날 파열음이 들렸다고 했으며, 누구는 그날 개기일식이 있었다고 했다. 바람이 분다. 분석해야겠다.

 

지하 도시

사람들은 지하 도시를 건설했다. 얼룩진 빨래를 삶으며 삶을 이해했다. 지하 도시 사람들은 다 똑같다. 5분만 더 자고 싶고 한 숟가락 더 먹고 싶고 일하기는 죽기보다 싫다. 푹신한 양털 침대에서 일어나든 야자수에 걸린 해먹에서 일어나든 뭄바이 천막에서 일어나든 사람들은 모두 똑같다. 아침은 생태적으로 저주에 가깝다. 지하 도시는 굳건하다. 집집마다 커다란 가방이 하나씩 있다. 종종 이사에 쓰이지만 가끔씩은 생이 담긴다.

 

얼음의 온도

얼음을 나르는 사람들은 얼음의 온도를 잘 잊고, 대장장이는 불의 온도를 잘 잊는다. 누군가에게 몰입하는 일. 얼어붙거나 불에 타는 일. 천년을 거듭해도 온도를 잊는 일. 그런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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