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 한 잔
전날 새벽 지방에 내려갔다가 오늘 새벽, 밤새 내리는 빗속을 운전하여 돌아온 친구가, 차 한잔 마시자고 한다. 사무실에서 몇 가지 일을 처리하고 일찍 집으로 돌아갈까 하다가, 가는 길에 전화를 건다며 차 한잔하자고 한다. 친구는 나를 태우고 나무와 풀이 있는 카페로 가서 차를 주문한다. 토요일 오후가 천천히 지나가는 동안 우리는 차 한 잔을 마신다. 피곤한데 그냥 들어가서 쉬지 그랬어, 하니까 너 심란한 일 있잖아, 하고만 대답한다. 안 심란해, 하고 아무렇지도 않게 말하면서 나는 웃는다. 오는 길에 걸려온 전화가 나쁜 소식인 것 같아 물어보니, 되어야 할 일이 되지 않았다고 아무렇지도 않게 말하며 웃는다. 갈수록 사는 게 힘들어지는 이유가 무엇인지 모르겠다고 하다가, 그래도 어떻게든 살 거라고 하다가, 찻잔을 비우고 일어서는데, 내내 우리를 지켜보고 있었던 초록색 생명들, 잘 가라고 손을 흔든다. 삶이 힘들지 않았다면 몰랐을, 이토록 작고 소중한 마음들.

쓴잔
저는 죽음에 대해서는 할 말이 없어요. 얼마나 그랬으면 그랬을까, 라거나 아무리 그래도 그렇게는, 라거나 그런 말을 할 수는 있겠지만, 스스로 자신의 목숨을 끊을 수밖에 없는 이유 같은 건, 본인밖에 모르는 거잖아요. 아프고 슬픈건, 그렇게 본인밖에 모르는 걸로 혼자 맞아야 하는 죽음이잖아요. 얘기할 사람이 없었거나, 얘기해서 누군가의 마음을 아프게 하기 싫었거나 그랬을까요? 그래서 그 모든 무거움을 혼자 끌어안았던 걸까요? 얘기하지 않아도 알아주는, 그런 사람이 곁에 있으면 안 되나요? 그 사람 때문에 어떻게든 살고 싶은, 그런 사람이 있으면 안 되나요? 무엇이 들어 있는지 빤히 알면서 그 쓴잔을 마시고, 마지막 순간을 기다릴 때의 그 마음에 대해, 우리는 함부로 이야기하면 안되는 거겠죠. 눈 한번 마주친 적 없는 사람이라 해도, 말 한마디 나눠본 적 없는 사람이라 해도.

거리
당신과 나 사이에
거리가 있어야
당신과 나 사이로
바람이 분다

당신과 나 사이에
창이 있어야
당신과 내가
눈빛으로 마음을 나눌 수 있다

어느 한쪽이 창 밖에 서 있어야 한다면

그 사람은 나였으면

당신은 그저 다정한 불빛 안에서

행복해라

따뜻해라

러시아의 크리스마스
있잖아, 그거 알아? 러시아의 크리스마스는 십이월 이십오일이 아니래. 러시아의 크리스마스는 일월 칠일이래. 뭔가 복잡한 계산법에 의해서 그렇다는데 그런 건 까먹었어. 그냥 그 말을 듣는 순간 굉장히 재미있단 생각이 드는 바람에. 전 세계 모든 사람에게 크리스마스는 십이월 이십오일인 줄 알았는데 그렇지 않다니 정말로 신기하지 않아? 당신은 지난 크리스마스에 혼자 있었다고 했지? 또 당신은 앓았다고 그랬지? 또 당신은 약속이 어긋나서 잔뜩 속상했다고 했지? 하지만 속상해하지마. 우리의 크리스마스는 아직 오지 않은 건지도 몰라. 우리가 만나는 날, 그날이 크리스마스야. 당신이 정말로 행복해하는 날, 그날이 크리스마스야. 행복한 당신을 보면서 내가 행복해하는 날, 그날이 정말로 우리의 크리스마스인 거야. 일 년에 크리스마스가 딱 하루일 리 없잖아. 그분은 언제나 우리와 함께 계시니까. 나는 또 이렇게 당신과 함께 있으니까. 우리 내년에는 우리의 크리스마스를 조금 더 많이 만들었으면 해. 아프지 않은, 함께 있는, 서로가 서로를 행복하게 해주는 그런 진짜 크리스마스들을. 기다려, 우리의 크리스마스를.

언제 누구를
나는 내 인생에서 중요한 사람들을 이미 만났고 앞으로도 만날 것이다. 나는 그때 그를 만날 준비가 되어 있었던가. 앞으로 누군가를 만났을 때 그와 동행하거나 그를 따라갈 충분한 자격을 갖추고 있는가. 그러니까 문제는 내가 오늘 어떻게 사느냐, 하는 것이다. 좋은 방향으로 가면, 좋은 사람을 만나게 된다.

연습하면 다 돼
삼 개월쯤 전부터 우울증에 시달렸다고 했다. 두 달쯤 전에는 아주 가까운 사람이 세상을 떠났다고 했다. 증세가 심해진 것 같아 며칠 전 병원에 가서 약도 받아먹었다고 했다. 딱 한 번 그 약을 먹었는데 다 토해냈다고 했다. 기분전환이라도 하려고 친구들과 속초로 여행을 갔다고 했다. 다음날, 농약을 먹고 병원에 실려 갔다고 했다. 아내와 아이가 속초로 내려가, 병원에 있는 그를 만났다고 했다. 잘 살아보자고, 이겨내 보자고 약속을 했다고 했다. 그는 평온한 얼굴을 하고 잠이 들었다고 했다. 그리고 새벽, 아내와 아이가 병실에서 자고 있는 사이에 혼자 밖으로 나가, 5층에서 뛰어내렸다고 했다. 모두 들은 이야기다.

슬퍼해야 하나. 화를 내야 하나. 원망을 해야 하나. 미안해해야 하나. 나는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몹시 혼란스러웠고 뭔가가 부서지고 무너지는 것 같았다. 그래서 솔직히 장례식장에 가고 싶지 않았다. 그 모든 것을 현실로 받아들일 자신이 없었다. 하지만 가지 않을 수는 없었다.
- 삶을 나누어 가졌으니, 죽음도 나누어 가져야 한다.
그런 목소리가 어디선가 들려왔기 때문이다.
기묘하게도 장례식장에 통곡은 없었다. 밤이 늦어지자 간간이 웃음소리도 들렸다. 그랬다. 우리도 무슨 이야기를 하다가 웃었다. 그때 형이. 맞아 형이. 그래서 형이.
- 결국 형이 우리한테 이렇게 술을 먹이는구나.
그러면서, 결국 누구도 그의 죽음을 현실로 받아들일 수 없었던 거였다.

그래도 한 시절이 끝났다. 한 사람이 사라졌다. 하지만 나는 오늘 몸을 추스르고 마음을 추슬러 마트에 가서 장을 보고, 청소를 하고, 빨래를 하고, 손톱을 깎고, 운동화를 빨고, 장조림을 만들고, 깻잎도 재어두었다.
그가 사라진 것이 믿어지지 않을 뿐더러, 죽음이란 믿고 안 믿고의 문제는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아무것도 끝나지 않았고 아무것도 사라지지 않았을지도 모르는 거다. 우리는 한때의 삶을 나누어 가졌다. 그런 것은 쉽게 사라지지 않는다.
그렇지? 그런 거지?
그의 소식을 들었던 날, 한밤의 포장마차에서 나는 친구에게 그렇게 묻고 싶었다. 하지만 묻지는 않았다. 묻기 전에, 대답을 들었으니까.
그럼. 그런거지, 라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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