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가지 생각을 표현하는 데는 오직 한 가지 말밖에는 없다. - 귀스타브 플로베르

'좋다'는 어떤가. 대체 얼마나 좋길래 '좋다'라 쓰고, 얼마나 나쁘길래 '나쁘다'고 적는가. '나쁘지 않다'는 얼마만큼 좋은 것이며, '좋지 않다'는 얼마만큼 나쁜 것인가. 앞의 문장이 선문답처럼 모호한 이유는 '좋다'와 '나쁘다'가 그만큼 모호하기 때문이다. 정도를 가늠하기 힘든 형용사는 주관적이고 불투명하다. 특히 대체할 수 있는 단어 폭이 넓어 자주 쓰는 '좋다'는 그만큼 부정확하다. '좋다' 하나가 '사랑한다, 착하다, 우수하다, 견고하다, 호감이 간다' 따위를 대체할 수있는 만큼, 꼭 '좋다'를 써야만 의미를 전달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사용하는 어휘 수를 늘리고 정확한 언어를 알맞은 자리에 넣기 시작하면 '좋다'만큼 불필요한 단어도 없다.

모든 생각을 구체적으로 묘사하자. 생각과 단어가 그대로 포개지도록 쓰자.

'~에 대해', '~에 관해', '~을 통해'는 많은 경우 문장을 늘어지게 한다. 조사 한 단어로도 충분한 자리에 '~에 대해', '~에 관해', '~을 통해'를 넣으면 문장이 길어지고 리듬이 망가지기 때문이다. '국민들은 후보자의 공약에 대해 신뢰하지 않는다'보다는 '국민들은 후보자의 공약을 신뢰하지 않는다'가 훨씬 간결하다.

생각을 잘게 조각내려면 대상을 나누어 관찰해야 한다. 나는 처음으로 사랑했던 그녀가 어떤 농담에 웃고, 어떤 농담에 웃어줬는지를 기억한다. 정말로 웃을 때는 눈가에 잘게 주름이 지고 광대에 도톰하게 살이 차올랐던 반면 웃어줄 때는 입꼬리가 평소보다 높이 올라가고 눈이 살짝 처지곤 했다. 그녀는 사람들에게 '너는 충분히 유쾌한 사람이야'라고 소곤대듯 규칙적으로, 의무적으로 웃곤 했는데, 나는 그녀가 정말로 웃을 때와 웃어줄 때의 차이를 구분할 수 있을때까지 미소를 수백 번 지켜봤다. 그녀는 얼굴로 웃는 게 아니라, 눈으로 웃고, 입술로 웃고, 보조개로 웃었다. 수백 번의 웃음을 본 뒤에야 나는 그녀의 웃는 모습을 온전히 기억할 수 있었다.

우리가 말하려는 것이 무엇이든 그것을 표현하는 데는 한 가지 말밖에 없다. 그것을 살리기 위해선 한 동사밖에 없고, 그것을 드러내기 위해선 한 형용사밖에 없다. 그러니까 그 한 말, 그 한 동사, 그 한 형용사를 찾아내야 한다. 그것을 찾는 일이 어렵다고 아무런 말이나 갖다 쓰고는 만족하거나 비슷한 말로 맞춰버리는, 그런 말의 요술을 부려서는 안된다.

글쓰기에는 왕도가 없다지만 누군가 꼭 알려달라고 부탁한다면 플로베르와 모파상의 말을 인용하련다. 좋은 글은 아름답기 이전에 정확해야 한다. 정확해야 아름다울 수 있다. 보고, 듣고, 느끼고, 생각한 것들을 추리고, 정돈하고, 매만져 정확한 언어로 밝혀 적는다면 글쓰기는 그것으로 충분하다. 더 이상 정확하게 쓸 수 없을 만큼 정확한 문장은 더 이상 아름다울 수 없을 만큼 아름답다.

정서에 맞는 어감 - 봄볕에 '햇발'이 어울린다면 여름볕엔 '햇볕'이, 가을볕엔 '햇살'이, 겨울볕엔 '햇빛'이 어울린다. 내리쬐듯 뜨거운 기운엔 '볕'이 알맞다. 그래서 여름볕은 '햇볕'이다. 반면 바람이 뺨을 할퀴고 지나가는 가을은 볕도 창공을 가르듯 날카롭게 날이 서 있어 'ㅅ'소리가 적합하다. 그래서 가을볕엔 광선처럼 내쏘는 '햇살'이 꼭 알맞다. 강물이 멈추고 대지가 어는 겨울은 어떤가. 겨울은 사절기의 마지막이자 '종말', '황혼', '최후'와 어울리는 계절이다. 해는 떠 있지만 날은 차고 대기는 건조해 겨울볕은 '볕'보다는 '빛'에 가깝다. 어둠을 몰아내는 희망의 '빛'처럼 얼어붙은 대지에 아득한 봄을 예고하는 겨울볕에는 '햇빛'이 적절하다.

글은 덜어낼수록 좋아진다. 의미에 별다른 차이가 없다면 글은 짧을수록 좋다.

이중피동
‘쓰여지다’는 이중 피동 표현이다. ‘쓰여지다’, ‘불리어지다’, ‘믿겨지다’ 따위는 피동 접미사에 피동의 의미를 더하는 보조동사 ‘지다’를 덧붙인 표현이다. 피동만으로도 기피해야 할 표현이니, 이중 피동은 말할 것도 없다. 절대로 쓰지 말자. 참고로 ‘알려지다’ 나 ‘밝혀지다’를 이중 피동 표현으로 오해하는 사람들이 많다. ‘-이-‘, ‘-히-‘, ‘-리-‘, ‘-기-‘ 가 피동 접미사인 동시에 사동 접미사이기도 해서 그렇다. ‘알려지다’는 사동사 ‘알리다’에 ‘-어지다’가 붙은 말로 이중 피동 표현이 아니다. ‘밝혀지다’ 역시 ‘밝히다’가 사동사이므로 이중 피동 표현이라고 볼 수 없다.

앞 문장에서 이미 언급한 정보는 반드시 잔상을 남긴다. 구태여 지시어를 써서 상기시켜 줄 필요가 없을 때가 많다. 글은 덜어낼수록 좋아진다. 지우고, 지우고 또 지우자.

의미중복
단어의 의미를 의미 없이 보충하는 말들이 많다. 생각이나 느낌앞에 습관적으로 붙이는 ‘개인적인’이 대표적이다. 감정, 느낌, 기분, 생각은 늘 주관적이고 개인적이다. ‘개인적이다’라거나 ‘주관적이다’라는 말을 구태여 붙일 이유가 없다. 개인적인 감정과 마찬가지로 ‘솔직한 고백’, ‘내면적인 성찰’처럼 습관적으로 덧붙이는 표현들은 쓰지 말자. 늘 성찰은 내면적이고, 고백은 솔직하다. 덧붙일 이유가 없다. 단어의 의미를 곱씹어 보고 그 단어만으로도 충분하다면 별도의 수식이나 첨언은 불필요하다. 적게 쓰면서 많이 이야기하는 게 글쓰기의 핵심임을 잊지 말자.

의미 중복은 구나 절 단위에서도 나타난다. 사람들은 숙원만으로도 묵은 소망이건만 ‘오랜 숙원’이라 말한다. ‘여생’만으로도 ‘남은 생’인데 ‘남은 여생’이라 쓰고 ‘황야’는 거칠기 마련인데 ‘거친 황야’라고 적는다. ‘좋은 호평’, ‘푸른 창공’, ‘맡은 임무’, ‘옅은 미소’ 역시 의미를 중복해 밝힌 표현이다. 되도록 사용하지 말자.

‘지나치게 과소평가하다’는 흔히 쓰는 중복 표현이다. ‘과소평가’에 이미 ‘과하다’할 때 쓰는 ‘과’자가 붙는다. ‘내가 널 지나치게 과소평가한 것 같아’라는 표현은 ‘내가 널 지나치게 저평가한 것 같아’ 혹은 ‘내가 널 과소평가한 것 같아’정도로 고쳐 써야 한다.

홍길동전을 쓴 허균이 ‘어렵고 교묘한 말로 글을 꾸미는 건 최고의 경지에 이른 게 아니라 문장의 재앙이다’라고 말한 이유를 곱씹어봐야 한다. 좋은 글은 정직하면서도 소탈하고, 단정하면서도 무엇보다 쉽다.

작은따옴표 (‘’)
마음속으로 한 말을 적거나 인용말 안의 인용말을 표시할 때 쓴다지만, 그보다는 특정 구절이나 문장을 글과 나누어 떨어뜨릴 때 주로 사용한다.
단어나 구에 작은따옴표를 붙이면 따옴표 안의 내용이 도드라진다. > “가을은 ‘이별의 계절’이다.”
속어나 은어 따위에 붙이는 작은따옴표도 있다. “‘막장드라마’는 어느 틈엔가 안방극장으로 스며든 스테디셀러다.”에서 작은따옴표는 ‘속칭’이나 ‘이른바’를 대신하는 문장부호다.
아무리 가볍고 산뜻한 문장부호라지만 작은따옴표를 자주 사용하면 글에 부담을 주고 독자를 혼란스럽게 할 수 있다. 적절하게 사용한 작은따옴표만이 노신사의 행거칩처럼 글의 품격을 높인다는 걸 잊지 말자.

쉼표(,)
쉼표는 쉼보다는 연장 혹은 지속과 관계를 맺는 문장부호다.

줄표(-)
줄표는 문장 중간에 특정 구절을 삽입하는 역할을 한다. ‘처음 잡은 그녀의 손이 눈송이-그녀에게 사귀자고 고백한 날 내 입술에 앉은 눈송이가 그랬다-처럼 차가웠다.’ 줄표는 줄표가 없었더라면 다음 문장에서 설명해야 했을 내용을 단어가 나온 김에 설명할 수 있도록 돕는 문장부호다. 작가에게는 편리한 문장부호지만 독자들은 줄표 사이에 들어간 내용이 길어질수록 문장의 구조나 의미를 파악하기 힘들어한다. 되도록 쓰지 말자.

모든 초고는 걸레다. - 어니스트 헤밍웨이

지울수록 의미가 선명해지는 수사들이 있다면 공들여 쓴 표현이라도 과감히 지워야 한다. 걷는 데 방해가 되는 레이스 장식은 과감히 떼 버려라. 글쓰기는 생각쓰기다. 생각과 느낌을 정확하게 옮길 수 있으면, 글은 저절로 아름다워진다.

보고 듣고 느끼고 생각한 것들을 말할 때 쓰는 자잘한 수식어들, ‘조금’, ‘약간’, ‘얼마간’, ‘제법’, ‘꽤’ 등은 가지치기해야 한다. ‘조금 혼란스럽다’거나 ‘얼마간 피곤하다’거나 ‘다소 화가 났다’라고 쓰지 말자. 이 말들은 ‘약간 임신한 것 같다’는 말처럼 한심스럽다. 그저 ‘혼란스럽다’, ‘피곤하다’, ‘화가 났다’로도 충분하다. 주저하는 인상을 주는 자잘한 수식어들은 글을 답답하게 만든다.

문장의 각 단어는 띄어 쓰고, 조사는 붙여 쓴다.

지, 만, 번, 데, 뿐, 대로, 만큼

: ‘서운하게 들릴지도 모르지만’이라고 적을 때 ‘지’는 앞말과 붙여 써야 한다. 반면 ‘혁신의 아이콘, 스티브 잡스가 세상을 떠난 지 4년이 흘렀다’에서 ‘지’는 띄어 써야 한다. 이처럼 일일이 외우는 것보다는 “의존명사 ‘지’를 제외한 나머지는 붙여 써야 한다”고 기억하면 편하다.
‘지’는 특정 시점부터 지금까지의 시간을 가리키는 의존명사이다. ‘시간’과 어울린다는 사실만 기억하자. ‘그녀를 만난 지 세 달이 지났다’는 문장처럼 의존명사 ‘지’ 뒤에는 반드시 ‘기간’이 드러난다. 그러니 시간과 어울리는 ‘지’만 앞 단어와 떨어뜨리고, 다른 ‘지’는 붙여 쓰면 띄어쓰기 오류를 피할 수 있다.

: ‘만’은 두 가지 뜻만 기억하면 편하다. 하나는 시간과 함께 쓰는 ‘만’이다. ‘얼마 만에 먹어보는 초밥이냐’라고 적을 때는 ‘만’을 띄어 써야 하는 반면, ‘너를 사랑하는 내 마음이 얼마만 한지 너는 짐작도 못 할거야’라고 쓸 때는 붙여 써야 한다. 둘 다 형태는 같지만 앞의 ‘얼마’는 시간을 가리키는 반면 뒤의 ‘얼마’는 크기나 정도를 가리킨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다. ‘그녀는 그와 만난 지 두 시간 만에 지루함을 느꼈다’처럼 시간과 어울리는 ‘만’은 앞말과 띄어 써야 한다.
더불어 타당한 이유가 있음을 나타내는 의존명사 ‘만’역시 띄어 써야 한다. ‘여자 친구가 화낼 만도 했네’처럼 말이다.

: 일의 차례나 횟수를 나타내는 의존명사 ‘번’은 앞말과 띄어 써야 한다. 대체로 쉽게 구분할 수 있지만, ‘한번’과 ‘한 번’을 구분하기란 쉽지 않다.
‘시도’를 나타내는 부사 ‘한번’은 붙여 써야 하고, ‘한 번, 두 번’할 때 쓰는 ‘번’은 앞의 ‘한’과 띄어써야 한다.
‘실패할 때 실패하더라도 한번 해봐’라고 적을 때 사용하는 ‘한번’은 ‘시도’의 뜻을 갖고 있는 부사다.
‘부사’인지 ‘수사+의존명사’인지 구분하는 손쉬운 방법은 그 자리에 ‘두 번, 세 번’을 써보는 것이다.
만약 ‘두 번, 세 번’을 넣어 자연스럽다면 ‘한 번’처럼 띄어쓰고, 어색하다면 ‘한번’ 같이 붙여 쓰면 된다.

: 의존명사 ‘데’는 ‘장소,일,경우’를 대신한다. 의미망이 넓은 단어이므로 되도록 피해야 하지만 쓰고자 한다면 앞 단어와 띄어 써야 한다.

뿐,대로,만큼 : 뿐, 대로, 만큼은 의존명사이거나 조사다. 의존명사라면 띄어 써야 하며, 조사라면 붙여 써야 한다.
‘체언(명사,대명사,수사)뒤에 오는 ‘뿐,대로,만큼’은 조사이니 붙여 써야 한다’는 규칙만 기억하자.
가령 ‘사막에서 밤하늘을 보고 있자니 지구에 우리 둘뿐인 것만 같아’라고 쓴다면, 수사 ‘둘’에 조사 ‘뿐’을 더한 표현이므로 붙여 써야 한다.
반면 ‘그저 열심히 쓸 뿐이다’처럼 ‘쓰다’의 어간에 관형사형 어미 ‘-ㄹ’을 더한 ‘쓸’ 뒤에 오는 ‘뿐’은 의존명사이므로 반드시 띄어 써야 한다.


만약 시간이 넉넉하다면 소재를 찾고, 자료를 모으는 데 시간을 오래 투자하는 게 좋다.
실제로 ‘현상파악, 원인분석, 해결책제시’ 구조를 따르는 일반적인 글은 자료를 수집하고 정리하는 과정에서 구상이 끝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렇게 구상이 끝났다면 개요는 불필요하다.


개요 없이 글을 쓰기가 정 두렵다면 글의 첫 문장과 마지막 문장을 적어두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
개요를 짤 시간에 첫 문장과 마지막 문장을 다듬는 것만으로도 글의 품격을 높일 수 있다.

일화로 도입부를 써 보라 하면 보통 사람들은 거창한 일화를 생각하느라 골머리를 앓는다. 그러나 일화는 특별하지 않아도 좋다. 작고 사소한 일화일수록 그 속에 담긴 삶의 지혜가 빛나는 법이다. 그러니 부디 지나치게 평범한 삶을 살아서 이야깃거리가 없다고 낙담하지는 말자. 글로 쓸 만한 이야깃거리가 없다고 느낀다면, 당신은 이야깃거리를 찾는 데 골몰하느라 친구의 말버릇, 거리의 풍경, 실시간 검색어에서 찾을 수 있었던 수많은 소재들을 놓치고 있는 것이다.

나불거리지 말고 끄적거려라
글은 써야 는다. 대체로 많은 필자들이 이 사실을 애써 모른 척한다. 하루에 문장 한 줄 쓰지 않으면서도 작문 이론을 배우거나 책을 읽는 일로 글쓰기 훈련을 하고 있다고 착각한다. 작문 이론을 배우거나 책을 읽은 시간은 엄밀히 말하자면 ‘글을 쓰지 않은’ 시간이다. 그러므로 이 시간은 간접적이고 암시적이다. 직접적으로 글쓰기를 훈련하는 유일한 방법은 일정한 양을 정기적으로 쓰는 것이다. 그러나 그저 쓰기만 해서는 안 된다. 어제와 같은 방식으로 글을 쓰면 글쓰기 실력은 결코 늘지 않는다. 좋은 작가들은 어제보다 좋은 글을 쓰려고 노력한다. 주변 사람들에게 글을 보여주며 감상을 묻고, 나쁜 습관을 고치기를 주저하지 않는다. 도돌이표에 갇히지 않으려고 부단히 노력한다. 당신 역시 그래야 한다.

지우는 것 역시 퇴고다
아무리 고쳐도 나아질 기미를 보이지 않는 문장들이 있다면 통째로 지워보자. 그것이 정답인 경우는 의외로 많다.
어떤 문장들은 어눌하게 말한다기보다는 많이 말해서 문제다. 그렇기에 정확하게 말하도록 교정하는 것보다는 말하지 않도록 입을 막는 게 가장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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