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금까지 아이로 인해 받은 괴로움 때문에 그녀는 이제 새로운 애정으로 아이를 사랑할 수 있게 되었다.
- 「케어리, 날 따라와라. 길을 모르지?”」 선생이 말했다.
필립은 선생의 다정한 말에 그만 울음이 북받쳐올랐다.
「빨리는 잘 못 갑니다. 선생님」
「그럼 내가 천천히 가겠다」 선생이 싱긋 웃으며 말했다.
필립은 다정한 말을 건네준 이 붉은 얼굴의 평범한 젊은이에게 마음이 끌렸다.
- 교장은 주입식 공부에 대한 시험이 무슨 쓸모가 있느냐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가 원하는 것은 상식이었다.
- 「그야 학교란 보통 사람을 위해 만들어진 거지. 구멍이란 둥근 법인데, 마개 모양은 갖가지야. 하지만 모양이 어떻든 다 구멍 속에 집어넣어야 해. 보통 이상의 존재에게까지 신경 쓸 시간이 없지」
- 필립은 가벼운 실망감을 느꼈다. 아량을 베풀었으니 상대방은 무언가 감사의 표현으로 그를 감격시키리라 생각했던 것이다. 노선생이 선물을 당연한 것처럼 받아들이는 것은 뜻밖이었다. 필립은 아직 어렸기 때문에, 은혜를 입는 사람보다 그것을 베푸는 사람 쪽이 은혜에 대한 의식이 훨씬 강하다는 것을 몰랐다. … 노선생은 굽신거리듯 정중한 절을 한 다음 돌아갔다. 필립은 목이 메임을 느꼈다. 노인의 삶의 투쟁이 얼마나 참담한 것인지, 자기에게 즐거운 삶도 노인에게는 얼마나 고달픈 것인지 얼마만큼 알 것 같았다.
-「이해하리라 기대하지 않았습니다. 댁네의 냉정한 미국식 지성으로는 비판적인 태도밖에는 취하지 못하죠. 에머슨이라든가 하는 것들 말입니다. 하지만 비판이란 무엇입니까? 비판이란 순전히 파괴적이죠. 누구나 파괴는 할 수 있어요. 하지만 누구나 건설할 수 있는 건 아닙니다. 댁은 말입니다, 현학자죠. 중요한 건 건설하는 것입니다. 나는 건설적이죠. 시인입니다」
- 「성 아우구스투스는 지구가 납작하고 태양이 지구를 돈다고 믿었네」
「무슨 뜻인지 모르겠어요」
「사람은 자기 시대가 믿는 것을 믿는다는 말이지. 자네가 말하는 성인들은 신앙의 시대에 살았어. 그 시대엔 오늘의 우리가 도저히 믿을 수 없는 것을 믿을 수밖에 없었네」
「그렇다면 우리가 믿는 게 진리라는 건 어떻게 알지요?」
「모르지」
- 「그래, 자네는 내가 무슨 말을 해주길 바라나? 훌륭한 작품이라고 말해 주길 바라나? 그런데 그렇지 않아. 잘 그렸다고 말해 주길 바라나? 못 그렸어. 장점이 있다고 말해 주길 바라나? 없어. 어디가 잘못됐는지 지적해 주길 바라나? 다 잘못되었어. 이 그림을 어떻게 하라고 말해 주길 바라나? 찢어버려. 자 이젠 됐나?」
- 「비위를 맞추려고 하진 말게」 크론쇼는 통통한 손을 내저으며 대꾸했다.
「난, 내 시작품에 대단한 중요성을 부여하지 않네. 인생이란 쓰려고 있는 것이 아니라 살려고 있는 것이니까. 내 목표는 인생의 다양한 경험을 추구하는 것이네. 삶의 순간순간에서 그 순간의 정서를 음미하면서 말야. 난 내 글쓰기를 말이지, 존재로부터 기쁨을 흡수한다기보다 거기에 기쁨을 부여하는 아름다운 행위라고 보네. 후세의 문제는 말일세 – 후세 따윈 상관없네」
- 「난 남의 일에는 상관하지 않네. 나 자신에게만 관심이 있지. 대다수 인간은 특정한 보상을 바라고 직접 간접으로 내게 편리한 일을 하고 있네. 나는 그 사실을 이용하지」
「제가 보기엔 그건 만사를 아주 이기적으로 보는 방식입니다」 하고 필립이 말했다.
「아니, 그럼, 자넨 인간이 이기적이 아닌 동기로 무슨 일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한단 말인가?」
「그렇습니다」
「그건 불가능해. 자네도 나이가 들면 알게 될 거야. 세상을 살 만한 장소로 만들기 위해 무엇보다도 필요한 일은 인간의 불가피한 이기성을 인정하는 것이라는 것을. 자넨 타인에게 이기적이 아니기를 요구하는데 그건 자네의 욕망을 위해 타인더러 자신의 욕망을 희생하라고 하는 모순된 주장이야. 타인이 왜 그래야 하나. 모든 개인이 세상에 살면서 자기자신을 위한다는 사실을 자네가 받아들여야 자넨 다른 사람들에게 덜 요구할 수 있어. 다른 사람들에게 덜 실망할 거고, 다른 사람들을 더 자비롭게 바라볼 수 있어. 사람은 인생에서 단 한 가지를 추구하지. 그건 자기 자신의 쾌락이야」
「아녜요. 그렇지 않아요」 필립은 소리쳤다.
크론쇼는 낄낄 웃었다.
「놀란 망아지같이 왜 그러나. 자네 기독교가 싫어하는 말을 내가 사용해서? 자넨 가치에 등급을 두고 있어. 쾌락을 맨 아래두고, 의무라든가, 자비, 진실 같은 말을 할 때는 짜릿한 자기만족까지 느끼지. 자넨 쾌락을 감각에 관계된다고만 생각할 거야. 하지만 자네의 도덕을 만들어낸 그 비참한 노예들은 자기들이 누리기 힘든 만족은 죄다 경멸했지. 내가 쾌락이 아니라 행복이라는 말을 사용했다면 자넨 놀라지 않았을거야. 그 말은 덜 충격적이니까. 그리고 자네 마음은 에피큐로스의 돼지우리에서 그의 정원으로 이동하게 되니까. 하지만 난 쾌락이란 말을 사용하겠네. 왜냐하면 바로 그게 사람의 목표거든. 사람이 행복을 추구하는지는 모르겠어. 자네가 말하는 그 착한 일들을 실천하는 이유도, 알고 보면 쾌락 때문이야. 사람이 어떤 행위를 하는 것은 그것이 자신에게 이롭기 때문이지. 그것이 남들에게도 이로우면 선한 일로 여겨지는 거야. 은혜를 베푸는 데 쾌락을 느끼는 사람은 자비를 베풀지. 사회에 봉사하는 데 쾌락을 느끼는 사람은 공중정신을 가지게 되고. 하지만 자네가 거지에게 동냥을 하면 그건 자네 자신의 쾌락을 위한 거야. 내가 위스키 소다를 또 한 잔 마시는 게 내 자신의 쾌락을 위한 것이나 같아. 난 자네보다는 솔직한 편이라 내 자신의 쾌락을 위해 나 자신을 칭찬하거나 자네의 감탄을 요구하지 않네」
「하지만 하고 싶은 일보다 하기 싫은 일을 하는 사람들도 있지 않습니까?」
「없네. 자네 질문 방식이 틀렸어. 자네가 말하려는 건, 당장의 쾌락보다 당장의 고통을 받아들이는 사람들이 있다는 거겠지. 질문 방식도 그렇지만 문제 제기 자체도 어리석네. 사람들이 당장의 쾌락보다 당장의 고통을 받아들인다는 건 분명해. 하지만 그건 미래의 더 큰 쾌락을 위해서이지. 때로 쾌락은 환영과 같아. 하지만 계산착오가 있다고 해서 법칙을 부정할 수야 없지 않은가. 하지만 젊은 친구, 조국을 위해 목숨을 바치는 사람은 그게 좋아 그렇게 한다네. 그건 양배추 절임을 먹는 사람이 그게 좋아 먹는 거나 마찬가지야. 그게 창조의 법칙이야. 사람이 혹 쾌락보다 고통을 더 좋아할 수 있다면 인류는 진작 멸망했을거야」
- 「저 말야. 와서 내 그림 좀 봐주지 않겠나? 의견 좀 듣고 싶네」
「아니, 난 그런 거 않겠네」
「왜 말인가?」필립은 얼굴을 붉히며 물었다.
이런 부탁은 그들끼리 으레 하는 것이었고 아무도 거절하는 법이 없었다. 클러튼은 어깨를 으쓱했다.
「사람들은 비평을 부탁하면서도, 듣고 싶어하는 건 칭찬뿐이야. 그뿐 아니고, 비평이 무슨 소용이 있나? 자네 그림이 좋든 나쁘든 그게 무슨 상관인가?」
- 「세상에 가장 굴욕스러운 일은 말이지, 먹고 사는 걱정에서 헤어나지 못하는 일이야. 난 돈을 멸시하는 사람들을 보면 경멸감밖에 들지 않네. 그런 자들은 위선자가 아니면 바보야. 돈이란 제 육감과 같아. 그게 없이는 다른 오감을 제대로 사용할 수가 없지. 적정한 수입이 없으면 인생의 가능성 가운데 절반은 막혀버리네. 딱 한 가지 조심해야 할 것은 한푼 벌면 한푼 이상 쓰지 않아야 한다는 거야. 예술가에겐 가난이 제일 좋은 채찍이 된다는 말들을 하잖나. 그렇게 말하는 사람들은 가난의 쓰라림을 직접 겪어보지 못해서 그래. 가난이 사람을 얼마나 천하게 만드는지 몰라. 사람을 끝없이 비굴하게 만드네. 사람의 날개를 꺾어버리고, 암처럼 사람의 영혼을 좀먹어 들어가지. 부자가 되어야 한다는 건 아니야. 하지만 적어도 품위를 유지할 수 있는 정도, 방해받지 않고 일을 할 수 있고, 너그럽고 솔직할 수 있을 정도, 그리고 독립적으로 살 수 있을 정도는 있어야지. 나는 말이야, 글을 쓰건 그림을 그리건 예술하는 사람이 먹고 사는 일을 자기 예술에만 의존한다면 그런 사람을 정말 가련하게 보네」
- 사람들은 그더러 무감정하다고 했다. 하지만 필립은 자신이 감정의 노예임을 알고 있었다. 우연한 친절에도 쉽게 감격해 버렸고, 때로는 목소리가 떨려나올까봐 말을 하지 못하는 경우도 있었다. 고통스러웠던 학교 생활, 참아내야만 했던 그 굴욕, 창피스러운 꼴을 당하지 않으려는 병적인 강박 관념을 낳게 한 학우들의 조롱이 떠올랐다. 그뒤로 세상과 부딪혀 살면서 겪었던 외로움, 거침없는 상상력으로 세상에 기대했던 것과 실제로 겪은 현실의 격차가 주었던 환멸과 실망도 떠올랐다. 하지만 이제 그는 자신을 객관적으로 바라보고 즐겁게 미소지을 수 있게 되었다.
「그래, 내가 경박해지기라도 않았다면 자살이라도 했을 것이다」그는 유쾌한 기분으로 중얼거렸다.
- 마음속에 어렴풋이 가지고 있던 생각을 누군가의 멋진 글귀에서 발견하면 가슴이 뛰었다. 그의 정신은 구체성을 지향했기 때문에 추상적인 영역에서는 좀처럼 감동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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