캥거루는 캥거루고 나는 나인데

내 속에 캥거루가 있다면 믿지 않겠지요. 나 자신도 믿을 수 없으니까요. 캥거루가 새끼를 주머니에 안고 겅중겅중 뛸 때 세상에 별 우스꽝스런 짐승이 다 있네 그렇게 생각했지요. 하긴 나도 새끼를 들쳐 업고 이리저리 숨차게 뛰었지만 그렇다고 내 속에 캥거루가 있다고 말하면 안 되겠지요. TV에서 캥거루가 권투를 하는 걸 보았어요. 사람이 오른손으로 치면 캥거루도 오른손으로 뻗어 치고 왼손을 뻗으면 다시 왼손으로 받아치고 치고 받고 치고 받고. 사람이나 캥거루나 구별이 안 되더라구요. 호주나 뉴질랜드 여행 중 느닷없이 캥거루를 만나게 된다면 나도 모르게 앞발을 내밀어 악수를 청할 수도 있겠더라구요. 나는 가끔 쓸데없는 걱정을 많이 하는 편인데 캥거루 주머니에 빗물이 고이면 어쩌나 하는 식으로 우리 애들이 살아갈 앞날을 걱정하지요. 한번은 또 TV에서 캥거루가 바다에 빠진 새끼를 구하려다 물속으로 따라가 빠져 죽는 장면을 보여주더라구요. 그 주머니를 채운 물의 무게와 새끼의 무게를 가늠하다가 꿈에서는 내가 물에 빠져 허우적거리기도 했지요. 캥거루는 캥거루고 나는 나인데. 한밤에 이렇듯 캥거루 습격을 당하고 나면 영 잠이 안 오지요. 이따금 캥거루는 땅바닥에 구멍을 판다고 하더군요. 그러고는 그 구멍으로 아무것도 안 한다네요. 나도 쓸데없이 구멍을 파고 아무것도 안 하게 되네요. 캥거루는 캥거루고 나는 나인데.

 

벙깍 호수

오늘 작가회의로부터 이상한 문자를 받았다. 시인 최정례 부음 목동병원 영안실 203호 발인 30. 평소에도 늘 받아 보던 문자다. 그런데 아는 사람이었고 내 이름이었다. 실수임을 인정하는 정정 문자가 다시 오겠지 기다리며 그냥 있었다. 남편에게 전화해서 웃긴다고 말했더니 남편의 말이 그것은 시인의 죽음이지, 당신은 시인이 아니잖아 했다. 그러고 보니 그렇다. 딸애에게 내가 죽으면 제일 걱정되는 것은 자개장롱과 돌침대라고 했다. 딸애는 걱정 말라고 했다. 자기가 쓰겠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건 거짓말이다. 방 안 전체를 차지하는 이 무거운 구닥다리를 그 애가 쓸 리가 없다. 남 주거나 팔아버리지 말라고 했다. 딸애는 자기를 못 믿는다고 벌컥 화를 냈다. 작가 회의에 전화해서 항의할까 하다가 그만두었다. 회의에 참석한 적도 없고, 절친한 사람도 없는데 누구에게 내가 살아 있다고 주장할 것인가. 어쨌든 나는 살아있으면 되는 것 아닌가. 살아 있다. 난 정말 살아 있다. 그런데 궁금했다. 집 앞 문간에 의자를 내놓고 하루 종일 앉아 있는 사람들, 동남아시아 어디쯤에서 그런 사람들을 보았다. 나도 하루 종일 아무 일도 안하고 그냥 그러고 있다. 왜 벙깍 호수라는 이름이 갑자기 떠올랐는지 모르겠다. 그 호수는 매립되어 사라졌다고 한다. 택시를 타고 그 호수에 데려다달라고 했더니 운전수가 한 대답이었다. 벙깍 호수에도 못갔고 플리즈 원 달러를 호소하는 애들에게 일 달러도 안 준 나다. 한 번 주면 오십 명은 달라붙는다고 해서 못 줬다. 이상한 핑계를 대면서 나는 살아 있다. 친구들에게 전화해서 살아 있다고 말할까 하다 그만두었다. 친구들은 바쁘고 헛소리는 들어주지도 않는다. 나는 그냥 앉아서 지금은 사라졌다는 벙깍 호수만 그려보고 있다.

 

이름을 부를 때까지

35번 방에서 시력 검사를 하고 36번 방에서 안약을 넣고 안압 검사를 하고 37번 방 앞에서 이름을 부를 때까지 기다리라고 했다. 이윽고 간호원이 이름을 부르더니 동공 확장 약을 넣었다. 수납을 하고 오라고 했다. 자동 수납기가 말을 했다. 진료 카드를 넣어주세요. 비밀번호를 누르세요. 시키는 대로 다 했다. 영수증을 받아 간호원에게 가니 뭔가 잘못되어 시신경을 다시 찍어야 하니 수납원에게 다시 다녀오라고 했다. 여러 개의 방을 지났다. 코너를 돌고 또 돌았다. 수납이라고 쓴 화살표가 사라졌다. 대신 화장실 표시가 나타나서 들어갔다 나왔는데 이상했다. 무엇을 하러 왔는지 잊어버렸다. 황량한 벌판이었다. 한 여자 울고 있었다. 유모차를 붙잡고 우는 여자를 노부인이 달래고 있었다. 다른 병원으로 가보자. 부처손이라는 게 있다던데 그걸 달여 먹여보자. 못할 일이 뭐가 있겠니? 깊은 산속으로 가면 부처손이 있다. 엄마, 못 본다고 하잖아요. 아기 눈에 아무것도 안 보인다고요. 유모차에는 아기가 세상모르고 잠들어 있었다. 청바지를 입은 아직 처녀라고 해도 좋을 어린 엄마가 엎드려 울고 있다. 생명을 받은 대가로 생명을 몽땅 바쳐야만 인생아, 어린 엄마가 울고 있다. 여기서 더 이상 문장을 만들지 말라고 입 닥치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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