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게 진짜지 말입니다 물광이 빛나니, 불광이 깨끗하니 하는 얘기는 이제 고향 앞으로 갓, 이지 말입니다 이건 물 불을 안 가리는 광이라서 말입니다 제가 지난 휴가 때 용산역을 지나는데 말입니다 거짓말 아니고 말입니다 바닥에 엎어 자던 노숙자 아저씨가 제 군화 빛에 눈이 부셔 깼지 말입니다

우선 구두 약통에 불을 질러버리고 말입니다 불로 지져둔 군화에 약을 삼삼하게 바르지 말입니다 바르고 바르고 약이 마르면 또 바르는 겁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흠집을 대하는 우리의 기본적인 자세지 말입니다 깊게 파인 흠집을 약으로 메우는 것은 신병들이나 하는 짓 아닙니까 그렇게 하고 작업이라도 하면 그 약만 떨어져나오지 말입니다

흠집은 흠집이 아닌 곳과 똑같은 두께로 약을 발라야지 말입니다 벗겨져도 같이 벗겨지고 덮여도 같이 덮이는, 흠집이 내가 되고 내가 흠집이 되는 저희 어머니도 서른셋에 아버지 보내시고, 그때부터 아예 아버지로 사시지 말입니다 지난 휴가 때도 얼굴도 몇 번 못 뵙고 그나저나 이번에 효리 누나 춤 보셨습니까? 막 골반이 사시나무처럼 떨리는데 말입니다 아, 다 바른 다음 말입니까?

이제 약이 이렇게 먹어들었으면 여기에 물을 한 방울씩 털고 헝겊을 손가락에 두르고 같은 방향으로 밀고 나가야지 말입니다 김병장님 그런데 참 신기하지 말입니다 참말로 더는 못 해먹겠다 싶을 때, 이렇게 질기고 징하게 새카만 것에서 광이 낯짝을 살 비치니 말입니다

기억하는 일
서기 양반, 이 집이 구십 년 된 집이에요 이런 집이 동네에 세 집 남았어 한 집은 주동현씨 집이고 한 집은 박래원씨 집인데 그이가 참 딱해 아들 이름이 상호인데 이민 가더니 소식이 끊겼어 걔가 어려서는 참 말 잘 듣고 똑똑했는데 내 자식은 어떻게 되냐고? 쟤가 내 큰아들인데 사구년 음 칠월 보름 생이야 이놈은 내 증손주야 작년 가을에 봤지 귤도 좀 들어 난 시어서 잘 못 먹어 젊어서 먹어야지 늙으면 맛도 없지 뭐 젊어서도 맛나고 늙어서도 맛난 게 있는데 그게 담배야 담배, 담배는 이 나이 먹어도 똑같긴 한데 재작년부터 기침이 끓어서 요즘은 그것도 못 피우지 참다 참다 힘들다 싶으면 불은 안 붙이고 물고만 있어 그런데 서기 양반은 죽을 날만 받아놓고 있는 노인네가 뭐 예쁘다고 자꾸 보러 온대

환절기
나는 통영에 가서야 뱃사람들은 바닷길을 외울 때 앞이 아니라 배가 지나온 뒤의 광경을 기억한다는 사실, 그리고 당신의 무릎이 아주 차갑다는 사실을 새로 알게 되었다

비린 것을 먹지 못하는 당신 손을 잡고 시장을 세 바퀴나 돌다보면 살 만해지는 삶을 견디지 못하는 내 습관이나 황도를 백도라고 말하는 당신의 착각도 조금 누그러들었다

우리는 매번 끝을 보고서야 서로의 편을 들어주었고 끝물 과일들은 가난을 위로하는 법을 알고 있었다 입술부터 팔꿈치까지 과즙을 뚝뚝 흘리며 물복숭아를 먹는 당신, 나는 그 축농같은 장면을 넘기면서 우리가 같이 보낸 절기들을 줄줄 외워보았다

당신의 이름을 지어다가 며칠은 먹었다
(중략)
‘아픈 내가 당신의 이름을 지어다가 며칠은 먹었다’는 문장을 내 일기장에 이어 적었다

우리는 그러지 못했지만 모든 글의 만남은 언제나 아름다워야 한다는 마음이었다



- 그녀는 어려운 처지의 삶을 슬기롭게 꾸려나갔다. 뛰어난 유머감각을 가지고 있어서 아무리 고달픈 상황에서도 즐거움을 발견할 줄 알았다. 때로는 일이 잘못되어 돈이 거덜날 때도 있었다. 그런 때면 별것 아닌 집안 물건들이 복스올 브리지 로드의 전당포 행이 되곤 했고, 형편이 풀릴 때까지 입에 풀칠만 하면서 근근히 살았다. 하지만 한번도 명랑함을 잃지 않았다.

 

- 「그렇다면 자넨, 머리가 아주 뛰어나서 그 심오한 저자의 글을 한번 쓱 읽어서 이해할 수 있단 말인가?」

「저는 플라톤을 이해하고 싶지 않아요. 전 비평가가 아닌걸요. 그 사람에게 관심을 갖는다면 그 사람을 위해서가 아니라 저 자신을 위하기 때문이죠」

 

- 삶이 견딜 수 없게 될 경우라도 어떻게든 거기에서 벗어날 수 있는 길은 있다고 생각하니 그래도 마음이 놓였다.

 

- 헤이워드가 생각났고, 그를 처음 만났을 때 열렬히 존경했던 일이 떠올랐다. 그러고는 실망이 뒤따랐고, 그 다음은 무관심하게 되었고 결국은 버릇과 추억만으로 관계를 지탱했다. 사는 일의 기묘한 일 가운데 하나였다. 어떤 사람을 몇 달 동안이나 하루도 빼지 않고 만나 너무 친밀해져서 이제 그 사람 없이는 살지 못할 듯한 생각이 든다. 그러다가 헤어지게 된다. 그래도 모든 것은 아무 탈없이 진행된다. 없어서는 안 될 것만 같았던 친구가, 지나고 보니 없어도 된다는 것을 알게 된다. 생활은 계속되고 헤어진 사람에 대한 그리움도 느끼지 못한다.

 

- 크론쇼를 생각하며 필립은 그가 주었던 페르시아 융단을 떠올렸다. 인생의 의미가 무엇이냐고 묻자, 그것이 그 질문에 대한 답을 줄 것이라고 했었다. 갑자기 그 해답이 떠올랐다. 그는 픽 웃었다. 답을 알고 나니 수수께끼 문제를 받았을 때와 같은 기분이 들었다. 답을 알아맞추기 위해 골머리를 앓다가 답을 듣고 나면 왜 그것을 생각하지 못했을까 하는 생각이 드는 법이다. 해답은 분명했다. 인생에는 아무런 뜻이 없다. 우주를 돌고 있는 별의 한 위성 지구 위에서, 이 유성의 역사의 한 부분을 이루는 조건에 영향을 받아 생물이 발생했다. 지구상에서 생명체가 탄생했듯이 그것은 다른 조건 아래에서는 끝장을 볼지도 모른다. 다른 생명체보다 하등 중요하다고 할 수 없는 인간, 그 인간도 창조의 절정에서 생겨난 것이 아니라 환경에 대한 물리적 반응으로 생겨난 것에 지나지 않는다.

 

- 필립은 동방의 어떤 임금 얘기가 생각났다. 인간의 역사를 알고 싶었던 이 임금은 한 현자를 시켜 오백 권의 책을 가져오게 했다. 나라 일로 바빴던 왕은 책들을 간단히 요약해 오라고 했다. 이십년 뒤, 현자가 돌아와 오십 권으로 줄인 역사책을 내어놓았다. 하지만 임금은 이제 너무 늙어 그 수많은 묵직한 책을 도저히 읽을 수 없어 그것을 다시 줄여오도록 명령했다. 또 이십 년이 흘렀다. 늙어 백발이 된 현자가 임금이 원한 지식을 한 권의 책으로 줄여 가지고 왔다. 하지만 임금은 병상에 누워 죽어가고 있었다. 한 권의 책마저 읽을 수가 없었다. 그러자 현자는 임금에게 사람의 역사를 단 한 줄로 줄여 말해 주었다. 그것은 이러했다. 사람은 태어나서, 고생하다, 죽는다. 인생에는 아무런 뜻이 없었다.

 

- 자기 존재의 무의미함이 오히려 힘을 느끼게 해주었다. 이제까지 자기를 박해한다고만 생각했던 잔혹한 운명과 갑자기 대등해진 느낌이 들었다. 인생이 무의미하다면, 세상도 잔혹하다고 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가 무엇을 하고 안하고는 이제 중요하지 않았다. 실패라는 것도 중요하지 않고 성공 역시 의미가 없다. 그는 우주의 역사에서 아주 짧은 순간, 지구의 표면을 점유하고 있는 바글대는 인간 집단 가운데 아주 하찮은 생물에 지나지 않는다.

 

 

- 「샐리. 화나지 않았지?」 그는 불쑥 말을 꺼냈다.

그녀는 눈을 들어 담담하게 그를 바라보았다.

「제가요? 아뇨, 제가 왜 화를 내요?」

그는 기가 막혀 대꾸를 할 수 없었다. 그녀는 냄비 뚜껑을 열고 속에 든 것을 휘저은 다음 다시 덮었다. 구수한 냄새가 번졌다. 그녀는 다시 그를 바라보며 조용히 미소지었다. 입술은 거의 벌어지지 않는, 눈웃음에 가까운 미소였다.

「전 오래전부터 당신을 좋아했어요」

돌연 필립의 심장은 쿵 하고 뛰었다. 피가 뺨으로 확 몰려드는 것 같았다. 그는 간신히 들릴락 말락한 웃음소리는 냈다.

 

- 이미 닥터 사우스에게 편지를 써서 그날 아침에 받은 전보가 주머니에 들어 있었다.

<이하선염 멍청이 해고. 언제 오는가?>

 

- 「나와 결혼해 주겠지, 샐리?」

그녀는 꼼짝도 하지 않았다. 얼굴에 아무런 감정의 동요도 나타나지 않았다. 하지만 그녀는 그를 바라보지 않은 채 대답했다.

「좋으시다면」

「원하지 않는단 말야?」

「아뇨, 저도 당연히 제 집을 가지고 싶어요. 이제 자리를 잡아야 할 때도 됐구요」

그는 가볍게 미소지었다. 이제는 그녀를 웬만큼 알고 있었기때문에 그러한 태도가 별로 놀랍지 않았다.

「그렇다고 나하고 결혼하고 싶다는 건 아니잖아?」

「딴사람하고는 결혼하고 싶지 않아요」

「그럼 그걸로 됐군」

「엄마 아빠가 놀라시겠죠?」

「난 정말 행복해」

「전 배고파요」

「아, 샐리」

필립은 미소를 지으며 그녀의 손을 꼭 쥐었다. 두 사람은 자리에서 일어나 미술관을 걸어나왔다. 그들은 잠시 난간에 서서 트라팔가 광장을 내려다 보았다. 이륜마차와 승합마차들이 분주히 오가고, 사람들이 사방으로 바삐 걸어가고 있었다. 햇빛이 빛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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